월드컵 사상 첫 한·일 공동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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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사상 첫 한·일 공동개최

어깨동무 한·일 공동 월드컵

 

월드컵 축구대회는 세계 각지에서 예선을 거치면서 국가와 선수들의 명예를 걸고 각축을 벌이는 스포츠 단일종목으로 가장 큰 대회이며, 관심도 측면에서는 올림픽을 능가하고 있다. 우선 대회기간이 올림픽은 2주간에 걸쳐 개최되지만 월드컵 축구대회는 1개월간으로 2배이며, 특히 TV 시청 인구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월드컵 축구대회의 관심도와 인기가 높다는 것은 개최국 입장에서 국가를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처럼 관심도가 높은 대회의 지역 예선전이 3년여에 걸쳐 치러지기 때문에 개최국의 홍보 효과는 어떠한 외교적인 노력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여기에다가 한국축구는 오랫동안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던 수준이었다. 그런 우리나라에게 월드컵 개최는 하나의 꿈이었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유치

우리나라가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1993년 10월 28일 카타르의 도하에서 열린 1994 미국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때가 처음이었다. 1994 미국월드컵 진출권을 따낸 후 대한축구협회장이 기자회견에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유치를 선언한 이후 우리나라는 1994년에 월드컵유치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995년 2월에는 개최 후보도시 선정을 협의하는 등 유치 준비절차를 마련해갔다. 일본은 이보다 앞선 1988년 3월부터 준비에 착수하여 1989년 11월에 월드컵 유치를 공식발표 했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단독주최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보였으나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아시아지역 FIFA 부회장에 당선되면서 우리에게도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다. 정몽준 FIFA 부회장이 월드컵 개최국 결정투표권을 갖는 21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유치경쟁에서 부회장 지위를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11월 우리나라의 2002 월드컵 유치의사를 표명하는 공식서한이 FIFA에 제출되면서 한·일 간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경제력과 외교력, 국내의 여건 등에서 일본은 우리보다 매우 유리하였다. 일본과 외교적으로 가까운 브라질 출신인 아벨란제 당시 FIFA 회장이 노골적으로 일본 지지 발언을 하여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정 발언은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의 FIFA 집행위원들 가운데 잠재되었던 반 아벨란제기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 한국의 전략이 가세해 상황은 점차 우리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어 갔다.

한국과 일본의 유치경쟁이 과열양상을 보이자 아시아축구연맹(AFC)은 “한·일 간의 지나친 경쟁이 오히려 아시아 축구발전을 저해하므로 공동개최가 바람직하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고, FIFA와 5개 대륙 축구연맹에서 공동개최를 지지하면서부터 분위기는 급속히 공동개최 방향으로 변해갔다. 특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의 한·일 공동개최 지지는 이러한 대세를 이어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우리 정부와 대한축구협회도 공동개최 안에 동의하기에 이르고, 한국보다 먼저 월드컵 유치에 뛰어들었던 일본으로서도 공동개최 분위기의 대세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1996년 5월 31일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아벨란제 회장의 제안으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 하도록 투표 없이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한국과 일본의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는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두 나라가 공동개최 하는 대회로 유럽과 미주 이외의 대륙에서 열리는 첫 월드컵 축구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21세기 태평양 시대의 주역이 될 두 나라가 21세기 첫 월드컵을 함께 개최하고, 한·일 양국이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름으로써 그 의미를 더하게 된다.

 

함께 만든 월드컵 공동 개최 의의

21세기 첫 번째 월드컵이자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대회, 월드컵 사상 첫 한·일 공동개최, 세계 유일의 이념적 분단국가에서 개최됐다는 점에서 2002년 월드컵대회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림픽과 함께 세계인의 ‘2대 스포츠제전’인 월드컵의 개최로 대외 국가 이미지가 개선됨으로써 경쟁력이 강화되고 장기적으로 수출증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실제 오늘날 미국 경제의 호황은 40억 달러와 50억 달러의 흑자를 낸 94년 월드컵과 96년 올림픽이 일등 공신이다. 이 두 스포츠체전은 수십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와 함께 미국 경제를 대 호황의 길목으로 밀어 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일 월드컵은 사상 초유의 성공적 결실을 거뒀다. 지난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는 월드컵 역사상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월드컵을 처음 개최했던 한국과 일본 양국에게는 특히 더욱 큰 의미를 지닌 성공적 행사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월드컵 축구에서 4강의 신화를 창조한 한국에게 있어 2002 월드컵은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대회였으며, 과거의 그 어떤 행사보다도 크나큰 국가적 이익을 가져다준 대회요, 거사였다.

첫째, 한국 축구는 세계 4위의 성적을 공인받음으로써 아시아의 호랑이가 아니라 세계의 호랑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개최국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음은 물론, 국제 스포츠 사회에서 올림픽, 월드컵 양 대회의 성공적 개최로 스포츠 선진국 대열에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여 4위의 성적을 얻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또 4위를 하여 세계 경쟁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국민적 자긍심과 자신감을 드높였다. 특히 축구 자체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우 ‘세계축구 평준화’와 ‘한국 축구의 세계화’ 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은 2002년 월드컵 개최국임에도 불구하고 한·일 월드컵 이전까지는 1954년 스위스대회 이후 본선에 5회 출전하여 14전 4무 10패 11득점, 43실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을 영입한 이후 이른바 ‘파워프로그램’, ‘압박축구’, ‘멀티플레이어’ 등 한국선수의 여건에 부합하는 ‘한국형 축구’를 통해서 급기야 4강의 쾌거를 이루어냄으로써 세계 축구의 변방에서 중심부로 진입하게 되었다.

둘째, 새로운 한국형 스포츠 문화를 창조하였다. 대회 기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만들어낸 응원문화를 포함한 스포츠 문화의 수준을 세계 만방에 유감없이 과시했다. 우리 국민들은 소위 ‘필승코리아’라는 응원의 캐치프레이즈를 외치면서 거리응원 연인원 총 2,000만 명이라는 세계 스포츠사에 유례없는 집단응집력을 보였으며, 응원문화의 질적 우수성을 세계 속에 선보였다.

셋째, 그동안 국내에서는 낙후 분야로 여겨져 온 건설, 관광, 서비스산업과 스포츠 관련 산업 등 관련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월드컵을 통해 경제 기반의 확대와 선진화를 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또 지방자치제가 뿌리를 내려가는 시점에 10개 도시에서 월드컵이라는 대행사를 치러냄으로써 지역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외국기업 유치에도 도움이 되었다.

넷째, 21세기 지구촌이 지향하는 지식정보사회의 핵심적 과제인 IT기술을 월드컵을 통해 세계 속에 과시함으로써 세계인들이 한국의 잠재력과 국가능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였다.

다섯째, 월드컵에서 우리는 공동개최국인 일본과 비교하여 대회 운영면이나 성적 결과 등에서도 월등히 앞섰다. 그 결과 개최 효과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특히 컸다고 볼 수 있다. 보도에 의하면 대회 운영 면 부문별 평가에서 6:0으로 한국이 우수하고 성적 결과 면에서 4배(한국은 4강이고 일본은 16강이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응원문화 및 국민정신 신장 면에서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10배(일본 최고 동원 70만 명 : 한국 700만 명 – 인원비례만 단순히 비교하더라도) 이상의 효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한·일 공동개최로 인해 한·일간의 우호증진, 미래적 협력관계를 통해 양국이 선의의 경쟁적 동반자로서 상호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한·일 양국은 정치·경제적 상호의존성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역사적 경험, 일본정부의 잦은 발언 실수, 독도 문제 등으로 인하여 상호불신의 앙금이 계속 남아 있으나 월드컵을 통해서 이를 발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회 기간에는 한·일 공동응원단이 구성되어 경기장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들고 응원하는 모습들이 일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연출되기도 했다.

일곱째, 월드컵 개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일 월드컵은 월드컵의 수익을 한국과 일본이 반반씩 나누어 가짐으로써 개최 이익이 반감되고, 또한 우리나라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 수 위에 있는 일본과 공동개최함으로써 월드컵의 편익을 절반도 채 못 얻을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경쟁적 동반자인 일본에게 단기적인 경제 효과 이상의 장기적 문화 · 경제 효과를 얻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선진국 일본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으며 그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 새로운 역사를 만든 한·일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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